고대인의 혀끝에서 전해져 온 여지(荔枝)의 옛 이야기
From:금교Author: 2025-08-13 11:09
무더운 여름날, 신선한 여지를 몇 개 먹으면 마음속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 것 같다. 고대인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말 한 필이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자, 양귀비가 미소 짓는다. 그것이 남쪽에서 온 여지인 줄 아는 이 아무도 없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 이 유명한 시구는 고대 사람들이 여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여지를 먹는 것이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여지는 ‘이지(離支)’라고 불렸으며, 이는 ‘가지 치기’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은 서한(西漢)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창작한 <상림부(上林賦)>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 동한(東漢) 이후 ‘이지’가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여지’로 변했다.
고대인들은 여지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가졌을까? 그리고 어떻게 신선도를 유지했을까?
여지에 대해 언급할 때, 소동파(蘇東坡)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북송(北宋) 소성원년(紹聖元年, 기원 1094년) 10월, 소동파는 회주(현재 광둥성 후이저우시)로 유배되었고, 이로 인해 여지와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여지의 대변인’이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소동파는 회주에 있을 때 여지에 관한 10편 이상의 시를 썼으며, 여지와 관련된 편지와 글은 9편에 달했다. 그는 여지를 ‘아름다운 존재’라고 칭찬하며 ‘아첨하거나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스스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기품을 지니고있다(不須更待妃子笑, 風骨自是傾城姝)’, ‘하루에 여지를 300개 먹으니, 오랫동안 영남 사람으로 살라고 해도 마다치 않겠네(日啖荔枝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 등의 시구를 남겼으며 여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당(唐)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또한 여지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그는 <여지부(荔枝賦)>에서 사람들이 과일에는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의 5가지 맛이 있다고 말하지만, 여지의 달콤함은 여러 가지의 맛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이러한 풍부하고 아름다운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썼다.
여지의 맛은 훌륭하여 사람들을 군침 흘리게 하며, 신분이 높은 왕실 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한 원정(元鼎) 6년, 한무제(漢武帝)는 왕실 정원에 ‘부여궁(扶荔宮)’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여지 나무를 영남에서 장안(長安) 일대로 이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아열대 식물인 여지는 대개 습하고 고온이며 햇빛이 잘 드는 환경에서 자란다. 위하(渭河) 연안과 진령(秦嶺) 북쪽 기슭의 장안은 분명 여지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고, 결국 한무제의 여러 해에 걸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조정은 여지를 세공(歲貢, 해마다 속국으로부터 받아들이던 공물)으로 바꾸고 신선한 과일을 직접 공납하게 했다.
또 다른 여지의 ‘충실한 팬’인 송휘종(宋徽宗)의 경우를 살펴보자. 신선한 여지를 맛보기 위해 송휘종은 여지 나무를 뿌리째 뽑아 화분에 심고 수로를 통해 개봉(開封)으로 운반한 후 궁궐 내에서 정성스럽게 가꾸어 마침내 여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소량의 여지를 얻었다. 그는 역대 황제 중 신선한 여지를 즐길 수 있었던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고대인들의 열정은 단순히 시 속에서의 찬사와 여지 나무의 재배에 그치지 않고, 여지를 먹는 방법에서도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여지를 먹는 방법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한 전문가로 말하자면 명(明)나라 문인 서발(徐㶿)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지를 매우 좋아했으며,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매우 신경을 썼는데, 여지를 어떻게 먹는지를 기록한 <여지보(荔枝譜)>라는 책을 특별히 집필하기도 했다. 서발은 여지를 먹을 때, 반드시 아침 일찍 여지 숲에 가서 이슬이 맺힌 신선한 과일을 따야 했다. 그런 다음 산천수에 차갑게 담가야 여지의 달콤함과 시원함이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고 했다.
서발처럼 갓 따낸 여지를 즐기는 것 외에도, 고대인들은 보관이 어려운 여지를 다양한 심층 가공 미식으로 만들어 여지의 ‘숨겨진 먹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 시대부터 여지술을 양조하기 시작했다. 고대 사람들은 여지 과육을 수분이나 기름기가 없는 병에 넣고, 누룩을 추가하여 발효시킨 후, 뽕나무 껍질 종이로 병의 입구를 밀봉하고 그늘에 두어 1년 이상 숙성시켰다.
대문호 황정견(黃庭堅)은 여지탕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여지 주스를 꿀물과 섞은 다음, 신선한 여지 과육을 넣고 끓여서 마셨다. 여지를 좋아하는 고대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여지전(荔枝煎)’이라는 이름의 디저트도 있었다. 여지전은 껍질을 벗긴 신선한 여지를 즙을 내고, 남은 여지 과육을 꿀로 조리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고대인들은 여지를 식재료로 사용하여 요리를 만들고, 화귤홍여지흑계탕(化橘紅荔枝烏雞湯), 여지 설탕물 등 다양한 먹거리를 개발했다.
백거이(白居易)는 <여지도서(荔枝圖序)>에서 ‘여지는 가지에서 떨어지면 하루 만에 색이 변하고, 이틀 만에 향이 변하며, 사흘 만에 맛이 변하고, 사흘이나 닷새가 지나면 색과 향, 맛이 모두 사라진다’고 언급하며 여지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어려움을 자세히 설명했다. 신선함은 여지의 영혼이며, 신선함을 맛보는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냉장 기술이 부족했던 고대에 쉽게 상하고 보존하기 어려운 여지를 어떻게 신선하게 유지했을까? 신선하고 맛있는 여지를 먹기 위해 고대인들은 다양한 보존 방법을 연구한 ‘첨단 기술’을 발명했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는 왁스 보존법으로, 이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과일 보존 방법이다. 과일에 왁스를 바르면 표면에 왁스막이 형성되어 과일과 공기의 접촉을 차단하고, 과일의 수분 증발과 호흡 작용을 줄여 보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는 포장법으로 밀짚, 종이 또는 얇은 천으로 과일 표면을 감싸서 운송 중 충격과 압박으로 인한 손상을 줄이는 방법이다. 셋째는 대나무통(竹筒) 보존법으로 새로 베어낸 신선한 모죽통의 한쪽 끝 대나무 마디에 구멍을 뚫고, 여지를 넣은 다음 밀봉하고, 바깥쪽을 젖은 진흙으로 감싸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대나무의 자연 생리 활동을 이용하여 습도와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도운다. 마지막으로 소금 절임 방법으로 소금을 사용하여 과일이 공기와 과도하게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여 변질과 부패를 늦춘다.
여지의 신선한 단맛은 태양과 비의 은혜를 가득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고대인들이 신선한 여지를 맛보기 위해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며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천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시대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여지의 품종은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며 다양한 섭취 방법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과 미식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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